"사이하테 타히"라는 시인은 얼굴도 이름도 안 알리고 활동하는 일본 시인인데 독특한 시로 사이하테 타히라는 장르가 있다고 할 정도 란다. "밤하늘은 언제나 가장 짙은 블루"라는 제목이 마음에 들어 집었다가 재밌는 구절이 있었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 순간 평범하고 의미없었던 한 마디가 의미있어진다는 구절이었는데 예전에 읽었던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 빗방울 하나도 조심하게 된다는 시가 떠올랐다. 나는 사랑, 외로움, 고독과 관련한 시를 좋아하지 않는데 신기하게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삶에 대한 조바심과 죽음에 대한 걱정이 늘어난다는 말은 강하게 공감된다. 내가 살면서 그렇게 변한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런데 위의 구절이 정확히 기억이 안 날 정도로 강력한 문장이 다른 시에 있었다. " 재해 수준의 야경을 보고 싶다. " 이 문장 때문에 시집을 훑어보다가 의자에 앉았다. 나머지 뒤의 문장들과 전반적인 시의 내용이 개인적으로 내 취향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저 문장은 정말 황당하고 좋다. (시들은 죽음이나 고독, 허무, 사랑이 주제가 많았는데 내가 이제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아니면 원래 외로움을 잘 못 느끼는 사람이라 그런지 이러한 주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같다. 그래서 시가 조금 피곤하게 느껴졌다.) 이 사람 시를 가지고 영화를 만들었다던데 저런 구절들을 보면 그럴 수 있겠구나 싶다. 특히 이 사람은 매번 주제에 대해 황당한 문장을 갖고 바로 들이밀면서 시를 시작하는 듯하다. 시들이 저마다 첫 문장이 흥미로웠다. 누군가 주변 친구 중에 삶에 지루함을 느끼고 있는 감수성이 풍부한 친구가 있다면 이 사람의 시집 하나를 사서 주며 이 사람의 얼굴도, 이름도 안알려져 있다고 이야기를 들려주면 삶의 의욕이 샘솟을 것 같다. 자기 취향이 아니어도 이것저것 읽어볼 일이다. 저런 문장도 만날 수 있으니.
SF보다 vol1 얼음 중에서 남유하 '얼음을 씹다' 빙하기를 맞이한 사람들에 대해 떠올렸을 때 흔히 떠올리는 재난 스토리와는 다르다. 빙하기가 한참 지난 다음의 모습이다. 추운 빙하기에 대한 묘사가 섬세해서 더 시리다. 인육을 먹는 것이 불가피하게 관습이 되어버린 현실은 더 처참하고 모든 것이 얼고 바싹 말라버린 건조한 빙하기가 상상된다. 교보문고에서 책을 훑어보다가 이 단편의 마지막 부분, 자신의 아이의 손가락을 씹는 묘사에 충격을 받아서 이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다가 제대로 읽어보았다. 그래서 '얼음을 씹다'라는 제목이 달린 듯하고 징그럽지만 감각적인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얼음에 '씹는다'는 말을 붙인 것이 세련되게 느껴졌다. 이야기 속 비극적인 현실은 처음에 내용에 놀라고 그 뒤에는 슬프고 그럴 수도 있을까 갈등되게 만든다. 내 주변 사람들에게 읽은 책 얘기를 늘 들려주는데 이 이야기는 들려주면 못 듣겠다고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안 읽으려고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정도의 내용을 읽어 나가다가 후반부의 싸우는 장면의 묘사는 내가 못보는 슬래셔 무비를 눈 안감고 보는 느낌이었다. 얼마 전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보았는데 그 영화도 색다른 점이 많다고 생각되었는데 '얼음을 씹다'는 더 극적이다. Novum (노붐) 이 책의 뒤에 소설만큼이나 재밌는 비평 파트에 나오는 Novum이라는 SF 요소가 흥미롭다. 나는 정보, 사실 위주의 책이 아니면 소설도 에세이도 잘 읽지 않았는데 우연히 친구의 추천으로 테드 창의 숨을 읽고 나서 그 이후에 Sfnal 시리즈를 읽고 켄 리우의 작품과 메타버스 문학상 시리즈 등을 읽으며 SF 소설 중에서 단편만을 재미붙여 읽게 되었다. SF 소설에 대해 Sfnal이라고 부르려는 시도를 하는 분과 오늘 읽은 SF보다의 비평파트에서 Novum을 말한 사람 모두 SF 소설을 매우 사랑해서 이 장르에 대해 명확히 정리하려는
책이 신간에 속해서 좋고 문장이 좋다. 아이디어라는 제목처럼 사고방식을 배울 수 있는 책같다. 나는 요즘 그런 책이 매우 필요하다 [84쪽] 소셜 미디어 상의 관계를 통해 단순히 더 잦은 연락, 생생한 영상, 좋은 음질의 통화가 관계의 진정성에 기여하는 바는 극히 한정적이다. (이 부분에서 나는 주제 밖의 삶에서도 적용되는 이야기라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숱한 마케팅에 익숙해진 생생함, 화질, 음질을 가져오는 우수한 기술이 내 삶을 진정 최고로 이끄는데 무관한 관계일 것이라는 생각이 명확해졌다. 일정 수준의 만족을 위한 품질 기준만 넘어선다면 그다음부터는 종속에서 독립이 되는 관계들도 많을 것이다. 계속 흑백으로 사고하는 것을 경계한다면 좋을 것 같다. 처음부터 중간에 있는 것도 있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정도에 따라 중간에 가는 것도 있고 흑에서 백이 될 수도 있는 법이다.) '진정성'이라는 가치는 좋아요 등으로 정량화할 수 없다. 관계의 진정성은 그 관계 속에 있는 대상자들만이 체감할 수 있는 것이다. 인공지능의 발전으로 진정성 있는 관계가 인간에게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면, 사회적 통념보다 개인이 '체감하는 진정성'이 기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포용하는 것이야말로 기술을 통해 인생의 만족감을 증진시키는 선택지로 해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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