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쇼의 하이쿠 선집에서 다시 고른 것

1
꽃의 얼굴에
주눅이 들었구나
어렴풋한 달
2
너무 울어
텅 비어 버렸는가
매미 허물은
3
서리 밟으며
절룩거릴 때까지
배웅했어라.
4
눈 내린 아침
파만이 채소밭의
유일한 표시
5
여름 장맛비
학의 다리가
짧아지네
6
흰 양귀비에
날개를 떼어주는
나비의 유품
7
모란 꽃술 속에서
뒷걸음질 쳐 나오는
꿀벌의 아쉬움
8
구름이 이따금
달구경하는 사람들에게
쉴 틈을 주네
9
작은 새끼 게
발등 기어오르는
맑은 물
10
자, 그럼 안녕
눈 구경하러 가네
넘어지는 곳까지
(자, 가지 / 눈 구경하러 / 넘어지는 곳까지)
11
연약한 아이에
비유할 꽃도 없는
여름 들판
12
그 어떤 것을
골라도 닮지 않은
초사흘 달
13
둘이서 본 눈
올해에도 그렇게
내렸을까
14
나의 집에서
대접할 만한 것은
모기가 작다는 것
15
소금 절인 도미
잇몸도 시리다
생선가게 좌판
16
일가족 모두
지팡이에 백발로
성묘를 간다
17
선뜩선뜩한
벽에다 발을 얹고
낮잠을 자네
18
메밀은 아직
꽃으로 대접하는
산길
19
참혹하다
투구 밑에서 우는
귀뚜라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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